나에겐 무슨향기가 날까?
나바위 성지 순례 다녀옴 본문
나바위 성지에는 붉은 벽돌과 회색 전돌을 섞어 지은 뾰족한 탑의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성당의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어 한식과 양식의 절충식 건물로서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숲길을 따라 뒷산인 화산에 오르면 김대건 신부가 이곳까지 타고 온 배(라파엘 호)의 돛대 절반 높이와 같은 " 안드레아 김 신부 순교비 " 가 서있고,그뒤에 망금정이 있다.나바위 성당의 초대 신부가 기도와 묵상과 독서의 편의를 위해 1915년에 지은 작은 정자이다.
또 이곳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0월12일 밤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조선 교인등과 함께 이 땅에 첫 발을 디딘 곳 이기도 하다.
특히 나바위성당은 9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36년간의 일제 강점과 광복, 그리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의 애환을 함께 해온 유서 깊은 성당이다.이곳에서는 6.25 당시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들 덕택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 매일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또한 300명을 넘게 수용하는 피정의 집 대건 교육관이 있다.
나바위 성지 ( 전북 익산시 망성면 ) -------
이곳은 1845년 10월 12일 성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고주교를 모시고 첫 한국인 사제가 되어 상륙한 곳이다. 나바위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7년이었고, 현재의 성당 건물이 세워진 것은 1906년이었다.
목조 와가에 한식과 양식을 조화롭게 절충한 아름다운 이 성당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사적 318호).
이곳에는 "나바위 피정의 집"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는 "화산(華山)" 이라는 산이 있다.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는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있다. 화산위에 자리잡고 있는 "나바위 성당" 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통신제도)가 산위에 있었고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도 하였다. 인근에 있는 강경은 조선시대 3대 어시장의 하나로 번성하였던 곳이다.
이곳 화산은 우리 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조선 헌종11년(1845년) 10월 12일 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입국, 첫 발을 디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는 이곳을 성지로 가꾸고 있다. 나바위성당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한국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베르모델 신부(장약실·요셉)가 1897년 설립해 1906년(고종 광무10년) 성당건물을 완공하였다.
성당설계는 명동성당의포아넬 박신부가 도왔고 벽돌공과 목공일은 중국인들이 맡았다. 1916년에는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증축하여 이듬해에 마쳤다.
한국 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나바위 성당 건물은 특히 회랑이있어서 한국적인 미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바위 본당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서북지방에 있는 공소를 관할했다. 1929년 당시에는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자수가 3,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97년에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 본당은 일제시대, 6.25를 거치며 이민족과 애환을 함께해 왔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교육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몇 일을 제외하고 매일미사가 계속 봉헌되었다. 1949년부터는 간이진료소라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하여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 왔다.
나바위성당은 이곳에 1955년에 성 김대건 신부 순교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본받고 신심을 수양하는 피정의 집을 세웠다.
김대건 신부는 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상해 연안 김가항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고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뒤 입국길에 올랐다. 같이 출국했던 조선 선원들과 함께 페레올 고주교, 다블뤼 안신부를 모시고 모험 끝에 황산포구 나바위 기슭에 상륙하였다. 동승하였던 교우 한 사람이 3분의 성직자의 도착을 알리고 그분들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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