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무슨향기가 날까?

1980년대는 무엇을 남겼는가.../경향신문 | 이기수 | 사회부 차장 본문

쉬어가는 길목

1980년대는 무엇을 남겼는가.../경향신문 | 이기수 | 사회부 차장

국화향. 2010. 4. 2. 11:30

[마감 후…]1980년대는 무엇을 남겼는가


 
서해의 해저 개펄에 초계함과 함께 묻힌 게 있다. "3월이 미쳤다"고 말할 때 봄 폭설이나 김길태와 자웅을 겨룰 단어, '좌파'이다.

참 흔해졌다. 서울 강남에 어떻게 '운동권' 주지가 있느냐 시끄럽고, MBC는 새 사장이 '큰 집'에서 조인트 까지고 했다는 '좌파 임원진 청소설'이 이슈다. 'PD수첩'의 책임PD 교체도 연장선이다. 4대강 반대 성명을 발표한 종교인·작가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일방적인 색깔을 입힌 '우리법연구회' 판사들, 무상급식을 요구하는 교사와 학부모까지…. 입맛따라 붙이는 '좌파 딱지'가 홍수다. 흉악범 김길태도 좌파 교육을 받았다고 생짜 공격을 받았다. 여당이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으로 공격할 때 붙잡혀 때아닌 유탄을 맞은 것이다. 행정·입법·지방을 장악한 집권세력의 이념공세는 일방적일 수 있다. 정부가 여당 의원에게 넘긴 전교조 명단이 그렇다. 좌파 딱지가 사찰과 노동계로 번지고 역풍도 거세게 일 때, 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

처음도 아니다. 2년 전 촛불이 타오를 때 청와대 사람들이 집중 공격한 것은 '배후'였다. 오발탄임을 자각한 것은 한참 뒤다. '강부자·고소영' 내각, 참여정부 공공기관장·정책에 대한 '전봇대 뽑기'와 '어륀지' 논란, 한반도 대운하까지 민심의 너울이 높아졌던 당시 광우병만으로 들불이 타오른 게 아닌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2년이 흘러 4대강-세종시-무상급식의 3각 파도에 부딪힌 여권의 타개책은 다시 편가르기다. '어떻게든 말을 듣지 않을 사람들'이라며 천주교 신부들을 예단해 4대강 설명에서 빼버린 행태다. 촛불 때 이명박 대통령이 "뼈저리게 반성했다. 국민과 소통하며 함께 가겠다. 반대의견에 귀를 기울이겠다"며 내놓은 대국민담화문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3월 달력을 뜯으며, 문득 스쳐가는 물음이 있다. '1980년대는 무엇을 남겼는가.' 2월 말 서울대를 정년퇴임하면서 한상진 교수(사회학)가 세상과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운동권과 좌파만 없으면 세상이 조용하고 선진국이 될 것처럼 말하는 보수 매파에 대한 그의 시각은 정반대다. 이념·지역·빈부 갈등이 진행형인 한국 사회의 해법으로 그는 "강자의 약자 포용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답으로는 80년대 대학을 주목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보수가 '좌파 대중화'의 뿌리로 지목하는 그 시절이다.

한 교수는 "(당시만 해도) 사회의 주류로 진출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살았던 비주류의 삶"을 80년대 대학의 집단적 이미지로 집약했다. 얼마 전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씨의 외침처럼, 비정규직이나 알바로 전락하면서도 스펙 경쟁은 끝이 없는 오늘의 대학과는 여러모로 고민이 달랐던 때다. 서울대 초임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날것 그대로 삶의 고민을 쓰도록 해 받아둔 '2400여명의 생애사'를 그는 지금도 갖고 있다. 경제적 약자들(노동자·농민·도시빈민)을 함께 살 사람들로 매김하고, 사식 한 번 넣어주자며 감방에 간 동료의 영치금을 모으며, 사회과학 동아리마다 소(小)시민적 고민이 쌓였던 당시 캠퍼스의 기록들이다. 사회 갈등의 해법을 궁극적으로 내 옆과 아래를 챙기는 따뜻한 시선에 둔 것이다.

유령을 쫓는 좌파 딱지는 퇴행일 뿐이다. 30년 전 캠퍼스에서 오늘의 답을 찾는 노교수의 집념에서 울림을 갖는다. 학생들의 스크럼에서 붉은 머리띠만 보고, 열 사람의 한 걸음을 확인하는 차이. 그것은 과거와 미래로 갈라지는 것이다.

< 이기수 | 사회부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