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 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너무 반가웠다. 두 눈 다 팔아먹고 살아온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니,
나처럼 푼수기가 충만한 인사가 아니라 똑똑하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유
안진 시인이라니. 그녀는 한 번 읽고 나면 인생이 바뀌는 시를 쓰는 게
소원이라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자괴감에 빠져 있던 한
눈먼 사람이 이 시를 읽고 동지를 만난 듯한 기쁨에 용기백배했다면.
우리는 학교에서 시를 배울 때, 감상하기보다는 분석하도록 배웠다.
주제와 형식, 표현상의 기법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파헤쳤다. 하지만 시
에 이떤 수사법이 등장하는지, 그 숨은 뜻이 무엇인지를 왜 머리 싸매고
고민해야 하나? 시 속으로 들어가 시인의 가슴과 맞닿아보는 것 이상 무
엇이 더 필요한가?
이 시를 읽으며 스스로 가두어놓은 자아와 눈물겨운 해후를 할 수 있
다, 새롭게 출발하기를 다짐하는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다.
마음속 여백에 관하여
내가 알고 있는 여성 중에 아주 겸손하고 품위 있는 선생님이 한 분
있다. 그 지적인 모습에 호감을 갖고 있던 나는 그분의 전혀 다른 모습
을 우연히 목격하고 놀란 적이 있다. 자신의 어머니와 대화하다가 별 대
수롭지 않은 일로 불같이 화를 내며 독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야 어릴 적 그분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들이 무의식 깊숙이 억압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분은 유복한 가정에서 3남 1녀의 장녀로 자랐다. 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남동생들에 비해 어머니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증오는 수시로 마음의 약한
지표를 뚫고 올라와 폭발했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상처와 스트레스들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으
면, 그것은 장재의식으로 내려가 기억의 창고에 보관된다. 그러다가 어
느 한순간 예전의 경험과 유사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 그동안 억압
되어 있던 감정들이 분출되면서 과민반응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일'
때문에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과거의 '그 일'로 인해 상처 입은 기억의
뚜껑이 열려버리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문이 열리면 그동안 억눌려 있
던 모든 분노가 현재의 일과 합해져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마음속의 억눌림과 상처들을 치유하지 않고 가두어놓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은 응어리가 되어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튼다. 그리
고 거기다 다른 상처의 더께가 쌓이면서 콤플렉스로 굳어지고,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수시로 삶의 표면을 뚫고 나와 모든 서러움과 분노들
을 불러내는 것이다.
아프다 슬프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아지는 게
아니다.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지 않은 채 그저 참고 살아가면, 종내 고
통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삶의 허무감에 잠식당하고 결국엔 삶의 의
욕마저 잃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유난히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인 잡다한
소리들이 마음에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
이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도 소리를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한
정되어 있다. 그 용량이 차버리면 마음이 비좁아져서 별 대수롭지 않은
말도 참아 넘기기가 힘들어진다. 이럴 땐 쓰레기들을 내다버리듯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 그래야 따끔한 말도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마음이 넓다든지 아량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
들일 공간이 넓다는 뜻이다. 평소에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말하고 감정
표현을 잘하는 사람들은 웬만한 말을 들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상처로 남아 있는 말들은 세월이 지난다고 해
서 저절로 없어지거나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소리로 끄집어내
바깥으로 배출시켜야 한다.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계속 참으면서 살게
되면, 점점 삶의 의욕을 잃고 슬픔이나 허무감에 점령당하고 만다.
시낭송을 하는 것은 마음속에 쌓여 있는 고통과 슬픔을 소멸시키는 방
법이며, 마음을 비우고 청소하는 방법이다. 현대인이 점점 우울해지고
거칠어지는 것은, 귀로 들어가는 소리들은 많은 반면 입으로 나오는 소
들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휴대폰 등 통신기계와 대면하
는 시간에 비해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며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한
탓이다. 하루 종일 온갖 기계음과 소음 속에서 인간적인 감성이 메말라
가고 있다.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아픔이나 분노들을 이제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
켜보자. 미련하게 끌어안고 있던 묵은 감정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자.
시낭송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건강하게 마음을 청소할 수 있는 방법이
다.
- <시가 마음을 만지다> (쌤앤파커스, 2009) -